한겨례21 김영배 기자글입니다.



웹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김민철(32)씨는 10월 초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선 그저 황망할 뿐이었다. 법원으로부터 교통사고 보상금 조정 신청서가 날아들었다는 소식이었다. 조정 신청에서 보험사(LIG손해보험) 쪽은 추가 보상을 해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치료비로 들어간 돈 가운데 1500만원가량을 도로 물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피해자는 이중삼중의 고통 속에서 좌절


김씨의 부모인 김아무개(57)·양아무개(56)씨는 지난해 11월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과속으로 달려온 택배회사 차량에 들이받혀 허리와 목을 크게 다쳤다.


아버지는 목뿐 아니라 머리에까지 충격을 받아 정신과에도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다. 수천만원대에 이르는 수술비는 보험사 가불금으로 메웠다. 기계공장을 꾸려가던 그의 아버지는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김씨의 짐은 이중삼중이었다. LIG에서 제기한 민사조정 신청은 피해자 쪽에서 수용하지 않아 민사소송으로 이어진 상태다. LIG 쪽은 사고 피해자 모두 50대의 고령으로 기왕증(이미 있던 병)이 있었다는 의사 소견에 따라 조정 신청을 낸 것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부모님이 아무런 과실을 범하지 않았는데, 보상은커녕 치료비까지 물어내야 한다는 게 납득하기 힘들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수술을 받거나 정신과에 갈 일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김씨 가족의 사례는 보험금 지급 단계에서 보험사와 고객(또는 피해자) 사이에 생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보험소비자연맹 추정으로는 보험금 지급을 둘러싸고 불거진 소송이 1만 건을 훨씬 웃돈다. 보험업의 확산에 따라 분쟁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보험 분쟁은 보험사 쪽의 정당한 권리 행사 외에 압박성으로 여겨지는 ‘배짱 소송’도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정으로 옮아간 다툼의 성격은 함부로 재단할 수 없지만, 개인과 법인의 싸움에선 아무래도 개인 쪽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소송 초기부터 포기 상태에 들어가는 고객(또는 피해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남 김해에서 농약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용웅씨가 부인 김주영씨 이름으로 교보생명 ‘생생여성건강보험’에 가입한 것은 1999년 5월이었다. 계약자 김씨는 2003년 10월 병원에서 뇌경색 진단을 받고 보험금 지급을 청구했지만, 보험사로부터 거절당했다. 계약자 쪽이 ‘고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교보생명 보험금심사팀의 최채성 과장은 “김씨가 병원에서 뇌경색으로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고 입원한 뒤 보험에 가입했으며, 당시 입원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사기 의사’에 의해 계약이 성립됐기 때문에 계약을 취소하는 게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원래 있던 병을 숨겼다?


김씨의 설명은 이와 좀 다르다. “집사람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보험회사 설계사가 가게로 찾아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보험이 뭔지도 잘 몰랐고, 이것저것 따져볼 생각도 못했어요. 설계사가 설명해주는 대로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당시 설계사는 입원 사실을 알았고, 그의 아내는 일주일 만에 퇴원해 큰 병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2003년 아내의) 뇌경색 진단을 받고 보험금을 청구했더니 못 주겠다고 하더군요.



하도 억울해서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넣어봤는데, 사기 의사가 없으니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결정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회사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소송을 냈습니다.” 김씨의 설명대로 이 사안은 교보생명 쪽의 소 제기로 ‘채무 부존재 소송’으로 번져 있는 상태다. 교보생명으로선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채무)가 없다(부존재)는 내용의 소송이다.

교보생명의 주장대로라면, 김씨는 아내의 병(뇌경색)을 숨기고 보험에 가입한 사기 의사가 명백하다고 볼 수 있는데, 금감원에선 왜 보험금 지급 결정을 내렸을까?



올 3월 교보생명에 보낸 ‘분쟁조정신청에 대한 재검토 처리 요구’에서 금감원은 “(보험 가입 전에 진단받은) 다발성 뇌경색은 ‘의증’(의심되는 증세)이라, 확정진단받은 것으로 보기 어렵고 약물치료를 받은 뒤 퇴원한 것으로 확인돼 뚜렷한 사기 의사에 의해 (보험에) 가입했다고 볼 만한 객관적인 증거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또 “2003년 뇌경색 진단이 내려진 부위와 1999년 뇌경색 의증 진단을 받은 부위가 동일하다는 소견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금감원은 “사기 의사에 의한 보험 가입 여부에 대한 입증 책임은 보험사에 있음에도 사기 혐의 관련 수사기록 등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제시하지 않은 채 사기 혐의를 이유로 보험계약을 취소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가입자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재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금감원의 이같은 재검토 요구는 교보생명 쪽의 채무 부존재 소송으로 무시됐다. 금감원의 요청은 법적 구속력을 띠지 못해 소송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 무용지물로 변한다.



미래에셋생명과 보험계약을 맺었던 조아무개(41)씨가 당한 일도 이와 비슷하다. 식당을 운영하는 조씨는 일일수금 방식으로 보험 계약을 맺었다. 문제가 벌어진 건 담당 설계사인 김아무개가 퇴사하면서부터였다. 몇 차례에 걸친 조씨의 요청에도 해당 지점에선 방문 수금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보험 계약이 실효되고 말았다. 조씨는 계약 해지와 그동안 납입한 원금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이마저 거절당했다. 이 사건은 결국 금감원의 민원 제기로 이어졌으며 금감원은 “보험사에 책임이 있다”며 “민원인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처리하라”는 권고를 보냈다. 그렇지만 회사 쪽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법원에 소송을 낸 상태다.


보험설계자조차 소송 들어가면 막막해져

보험에 밝은 보험설계사조차 소송 사태에 이르면 막막해지기 일쑤다. 삼성생명 설계사인 송아무개(50)씨는 지난해 7월 대학병원에서 뇌CT(전산화단층) 촬영 및 뇌MRI(핵자기공명영상법) 검사에서 뇌경색 진단을 받아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회사 쪽으로부터 지급을 거절당했다. 이는 금감원의 민원으로 이어졌고, 금감원에선 지급 권고를 내렸다. 삼성생명은 이에 불복해 채무 부존재 소송을 제기했다가 결국 소송을 취하하고 보험금을 지급했다. 이 사건은 그나마 좋게 해결된 사안이지만, 소송에 들어가는 순간 개인들은 그 자체로 적지 않은 물적·심적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조연행 국장은 “채무 부존재 소송으로 법률적·경제적 약자인 피해자를 압박할 수 있기 때문에 보험금을 삭감하거나 합의를 종용하는 수단으로 종종 활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정확한 피해액을 산출하려는 정당방위 차원도 있지만, 보상액을 깎거나 아예 보상을 해주지 않으려는 의도 아래 일단 내고 보는 배짱 소송도 적지 않게 섞여 있다는 설명이다. 법적 다툼으로 번졌을 때 개인(고객 또는 피해자)은 법인(보험사)보다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형구 변호사는 “소송을 당하면, (개인들은) 일단 두려워하게 된다”며 “보험사 쪽에서 그런 걸 노리는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교보생명의 소송 대상인 김용웅씨의 경우 법적 다툼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가게를 비워놓을 수 없을뿐더러 병원비를 아끼려 요양원에 보내놓은 아내를 대신해 두 딸(10살, 8살)을 돌봐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내 요양비로 한 달에 60만원씩 들어가는데, 변호사 살 돈도 없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긴다는 보장도 없이 변호사비만 날릴 수는 없지 않느냐’의 김씨의 한탄에서 거대 보험사 앞에 선 개인의 무력감을 엿볼 수 있다. ‘법대로’가 거대 보험사에는 일상사일지 몰라도 개인에겐 일생을 건 도박일 수 있음을 실감케 한다.


법인과 개인, 싸움이 되나


보험 사기, 과잉 진료 횡행 등을 감안할 때 정확한 피해액을 산출하려는 보험사 쪽의 노력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더라도 금감원의 지급 결정까지 내려진 상태에서조차 채무 부존재 소송으로 이어가는 보험사의 행태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보험금을 지급할 시점에 이르러선 갖가지 이유로 보험금을 깎거나 없애려는 시도가 빈발하는 지금, 또 다른 곳에선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보험사의 치열한 영업이 이뤄지고 있다.